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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https://youtu.be/N1QLfH1YQb0?si=T2gOss7XAKMjJ3mo

 

눈이 온다.

 

 

가슴에서 입으로, 숨을 길게 밀어냈다. 막 몸 안에서 나온 뜨거운 바람이 희미한 김으로 변해 흩어졌다. 김의 크기가 저번보다 줄었다. 추위가 버티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현이 침침한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제는 시야의 테가 어둡게 보일 정도로 흐려졌다. 눈이 가물거릴 정도로 힘을 쏟아가며 계절을 늦췄는데, 여전히 부족한 건가.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고 굴 주위를 덮은 눈은 계속해서 두께가 얇아졌다. 눈이 모두 녹으면 봄이 온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봄 이전에 이뤄야 할 것이 있었다. 사현은 단단한 몸을 꽉 끌어안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아주 천천히, 그의 몸을 데우는 피가 한참 느리게 돌도록.

그의 스승은 너무 깊게 잠들었다. 이제 막 겨울의 초입일 때 잠들었는데 봄이 다 와 가도록 깨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오소리도 이렇게는 안 자는데.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몸이 두텁지도 않은데 자신이 굶는 줄도 모르고 자는 건 아닐까. 혹은, 그래, 몸의 체온이 너무 낮아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그 숨은 너무 미약해서 느껴지지도 않는데, 사현은 멋대로 그를 깨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숨죽여 잠든 사람을 억지로 깨우면 그것도 힘들 터다. 원래 겨울잠은 아주 푹 잠드는 거야. 그러니까 아직은 괜찮았다. 봄이 와도 못 깨어나면 사현 그가 직접 깨울 생각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잠에 취하게 고이 두기로 했다. 고작 이십여 년이라는 짧은 생을 참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니까 잠깐은 잠들어도 괜찮을 거다. 겨울은 원래 숨죽이는 계절이니까.

까마귀 하나가 근처로 날아왔다. 굴 문턱에 내려앉은 놈이 빤히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뱀인 걸 알아본 걸까. 사현은 손을 천천히 내저었다. 까마귀는 고개를 기울이고 굴 주위를 통통 튀며 맴돌았다. 하얀 눈 위에 찍힌 작은 발자국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다행이다. 눈이 쌓여 있는 게 맞구나. 사현은 안도하며 스승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직 봄이 오기엔 일러. 좀 더 자도 돼, 스승.

 

그의 맞은편에는 거대한 녹음이 있었다. 겨울이면 나무와 나무 사이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던 곳이었다. 그러나 맹렬히 팽창하는 가지와 이파리, 이끼가 뒤엉켜 만들어진 여름 숲의 몸통은 너무 빽빽한 나머지 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못해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다. 그 가지와 기둥 사이, 어둠만이 차 있는 나무들의 공동 사이에 생으로 가득 찬 여름이 있었다. 사현은 그 어두운 공동을 천적이라도 있는 양 노려보았다. 나무들의 공동 속에 여름이 도사리고 있다. 뺏어가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여름이었다.

그곳은 처음 사현이 굴로 돌아왔을 때, 그의 스승을 안고 첫눈이 내리는 걸 지켜봤을 때는 그와 같이 계절을 맞추던 숲이었다. 그러나 낮밤이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숲은 원래의 속도를 맞춰 몸을 바꾸었다. 아직 겨울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현과는 달랐다. 껍질을 깨고 새롭게 몸을 뻗고 새끼를 친 숲은 이전처럼 삶을 시작했다. 제멋대로 흘러가긴, 눈치 없이. 사현이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먼저 여름이 된 숲에서 열기가 언제 기어 나올지 몰랐다. 여름은 언제나 그가 있는 곳을, 그의 팔 안에서 쉬고 있는 스승을 앗아가려고 입맛을 다셨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앗아갈까 두려워 잠들지 않은 지도 그믐, 그리고 또 그믐이었다.

그렇게 먹고도 또 먹고 싶어 한다니. 여름은 뱀과 같지. 욕심이 너무 많고 언제나 굶주려 있어.

다급하게 생장하는 숲이 무자비하게 눈을 몰아내고 뜨거운 열기를 뿜어 추위를 앗아갈 때면 사현은 그들이 뱀의 아가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한번 물면 다시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여름은 제풀에 꺾여 지나가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시간에 갇혀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사현은 그것을 막고 있었다. 여름이 찾아와 그의 스승을 억지로 깨우고 생으로 몰아가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깨어날 때가 되면 자연히 깨어날 사람이다. 사현은 제 품에 있는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고, 더욱 겨울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릇되고 기이하더라도 아직 녹지 못한 눈을 가두고 찬 공기로 굴을 한껏 채웠다. 그저 겨울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니 그렇게 되었다.

처음,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자연을 거스른 그의 대가는 제법 혹독했다. 스승의 굳은 팔을 주물러주는데 손끝이 저렸다.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강인해진 적은 있어도 약해진 적은 없는 그로서는 처음 겪는 근육통이었다. 그래, 오래 안 먹었으니까. 영물도 너무 길게 굶으면 힘이 약해지는 거겠지. 하지만 겨울이란 건 원래 배를 곪는 계절이니까 스승이 일어나면 함께 봄 과일을 먹자고 생각했다. 스승, 그때는 우리 뭘 먹을까. 산딸기도 좋아, 봄나물도 좋아. 그냥 작은 샘물에서 단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좋아. 겨울잠이 끝나고 먹는 첫 식사는 원래 뭐든 달게 느껴지거든. 스승을 안은 채로 좌우로 몸을 서서히 흔드는데 울렁, 어지럼증이 솟았다. 사현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일이 자꾸만 잦아진다. 햇빛을 너무 안 봐서 그럴 것이다. 그는 짧게 심호흡하며 속을 다스렸다. 스승이 일어날 봄만 찾아오면 된다. 봄만.

 

곤히 잠든 몸은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손끝이 희멀겋게 변했다. 사현은 매일 같이, 열심히 그 몸을 주물러주었지만 한 번 굳은 피는 쉽사리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살아 있는 것은 본디 따스하고 말랑해야 하는데. 사현의 품에 안긴 자세 그대로 몇 날 며칠이고 잠든 스승은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추워서 그런 걸까. 사현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말았다. 희게 변한 스승과 달리 그의 몸은 까맣게 그을리고 있었다. 숯처럼 검게 물든 손가락이 흰 뺨에 닿으면 안 좋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본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는 한참이었으나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뱀도 부러울 것 없이 윤기 나던 비늘이 마르고, 갈라지고, 이내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인간의 거죽을 따라 한 몸조차 버티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하지만 괜찮다, 여전히. 이 정도조차 못 버틸 각오를 했을 리 없지. 그가 용이 되지 않은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으나 그중 하나가 지독한 고집 때문이었다. 죽이더라도 스승을 죽이는 건 그 자신이라는 고집을 그렇게나 쉽게 꺾을 거였다면, 꺾였다면, 그런 건.

사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스승의 등과 맞닿아 있는 팔이 뜨거웠다가 다시 차갑게 식었다. 너무 많이 흐른 붉은 피가 눈앞에 선명했다. 피에는 너무 익숙한데 그때만큼은, 어지러웠다. 지금 몸을 가누기 힘든 것처럼. 피가 저렇게까지 붉던가, 그러니까, 저건 너무 붉은 게 아닌가. 생명의 몸에서 저렇게까지 강렬한 게 쏟아질 수가 있나. 아마 두 손으로 막았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막고 눌렀다. 나오지 마. 더 흐르지 마. 너무 붉은 것이 마치, 그의 혼까지 쏟아지는 것 같아서.

여전히 눈이 온다. 사현은 거의 희끄무레하게 변한 눈으로 굴 바깥을 바라보았다. 흰 눈이 마구 흩날렸다. 굴 입구까지 막아버릴 것처럼. 그렇게 되면 너무 오래 빛을 보지 못한 그는 정말 먹과 종이처럼 색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되는데. 색을 잃은 그를 스승이 기억할 수 있을까. 사현이 쓰러지듯 한순간에 툭, 눈을 감았다.

 

 

스승. 이거 봐. 우리는 아직도 겨울에 남아 있어. 찬 바람은 까무룩한 잠을 부르고 동굴 초입의 씨앗은 아직 껍질을 깨지도 못했거든. 나무가 자라길 멈추고 태어나는 것이 없어지면 겨울은 아주 조용해져. 원래 숨을 쉬는 것이 적은 계절이잖아. 그래서 그런가, 스승의 숨소리가 아주 얕아. 가만히 들으려고 하면 작은 눈송이가 녹듯 훅 사라질 정도로 작아졌어. 잠들어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스승, 봄이 오기 전에는 일어나. 모든 게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나는 계절이 봄이잖아. 봄이 오면 스승도 눈을 뜰 수 있겠지. 다시 일어나고 날 마주할 수 있을 거야. 기담형, 난 아직 기다리고 있어. 아직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춥다. 아주아주 춥다. 벌써 밤이 되었다. 그는 잠시 잠들었다. 잠들지 않아야 하는데 스승을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잠이 너무 거셌다. 어둠 속에서 그는 더듬거리며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누군가 그를 뺏어가지 않았던가? 다행이다. 아직 품에 익숙한 무게감이 남아 있다. 산짐승이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어린 사슴 하나와 그것의 어미, 세 마리의 산 비둘기, 막 나무에서 뛰어내린 다람쥐. 그런데 왜 어두울까. 어두워서 스승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까. 사현은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똑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사현은 보드라운 머릿결을 더듬었다. 사위가 까맣게 물드니 스승의 머리끈이 끊어지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를 풀고 있으면 그가 혼낼 텐데. 자꾸만 웃음이 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매일 같이 혼났구나, 싶어서. 흰 머리칼을 단단하게 잡고 있던 머리끈을 끌어당겨 풀었다. 이제는 머리카락을 묶는 정도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어려운 거라면 그가 깨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잡는 거라서 사현은 스승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만 새끼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만큼의 시간을 썼다. 손으로 부드러운 것을 빗어 내리고 끈을 둘렀다. 여러 바퀴를 두르면서 생각했다. 몇 번의 삶을 돌면 그가 아무 티 없이 웃는 걸 볼 수 있을까. 보지 않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지금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끈을 질끈 당기고 묶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잘 묶였다. 한동안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사현은 그제야 뱉지 못하고 있던 숨을 터트리고 하, 웃었다. 이래도 깨어나지 않는구나. 평소의 스승은 눈동자만 굴려도 기민하게 굴었다. 그런데 머리를, 목을 만지고도 깨어나지 않는다니. 나에게 익숙해졌어? 장난 같은 생각을 하고 그를 다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는 여전히 짐들어 있다. 사현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대충 밀어 넘겼다. 혹시나 흐른 제 머리카락이 스승을 간지럽혀서는 안 되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안고 가만가만 졸았다. 자꾸만 졸음이 쏟아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여전히 겨울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인간조차 겨울잠을 잘 날씨라면 뱀이 버틸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도 겨울잠에 들어버리면 스승이 일어나 깨워주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현은 까맣게 변해버린, 자신의 몸을 유지할 도력조차 남기지 않은 몸뚱이로 아주 느리게 썩어가는 스승을 안았다. 스승. 벌써 봄인가 봐. 꽃내음이 나. 멀리서, 당신의 곁에서. 그를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깊고 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뱉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굴을 감싼 눈이 순식간에 녹고, 새싹이 허겁지겁 머리를 들어 올리고, 몸이 빠르게 부패했다. 뜨거운 여름의 바람이 굴 안을 훅 훑었다. 뱀의 검은 허물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굳은 피가 묻은 머리끈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