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담뱃갑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몇 개비 올라온 것 중 끝에 서리가 옅게 언 것을 입에 물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여자는 잠깐 행동을 멈추었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외투의 주머니를 헤집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외투 안주머니까지 뒤지고 나서야 그녀는 물고 있던 담배를 담뱃갑에 다시 집어넣었다. Блять. 소냐가 서 있는 다리 밑으로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여전히 날씨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외투 깃을 세우고 다리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오늘 같은 날에는 러시아인이라도 거리로 나오는 사람은 없다.
“Акинский!”
문이 닫히자 따듯한 공기가 노출되어 있던 손가락 끝에 달라붙었다. 언 몸이 천천히 녹았다. 총기상까지의 고작 5분 거리에도 눈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소복이 쌓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흰 눈은 대조적이었다. 데스크에 앉아 총기 부품을 빤히 바라고 있던 아킨스키가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소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곧장 가판대를 열고 뛰어왔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друг?”
“닥쳐.”
두꺼운 목도리를 풀어 던진 소냐가 아킨스키의 푸른 눈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얼었던 손끝이 녹는 간지러운 감각이 혐오스러웠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구더기와 표면이 굳은 피가 달라붙어 천천히 살을 녹여가는 느낌. 섬뜩한 소름이 돋아 손을 맞잡으면 굳었던 피가 터져 흘러내린 것처럼 피부가 붉게 트곤 했다. 오늘은 그 감각이 가장 강해지는 최저 기온의 날이었다. 그런 날 결근까지 써서 집에 틀어박혀 있던 소냐를 불러낸 것은 아칸스키였다.
“어쩔 수 없잖아. 당장 다음 주면 이동해야 하는데 너,가 다음 주는 안 된다며?”
“지랄하지 마. 불법 총기상 주제에, 짭새 뜰까 봐 미리 도망치는 거잖아.”
“짭새가 내 눈앞에 있는데 무서워할 게 뭐 있어? 그냥, 새로운 고객을 찾아 떠나는 거지.”
아킨스키가 손가락을 들이밀며 말에 강세를 붙였다. 불법 업자치고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업자 찾아가던가. 어깨를 으쓱인 그가 고개를 높게 쳐들었다. 등 뒤로 거센 바람이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소냐는 대꾸하지 않고 두꺼운 가죽 파우치를 그에게 던졌다. 어차피 그도, 그녀도 손쉽게 이 관계를 떨쳐버릴 순 없다. 낡은 시계의 틱틱거리는 소리만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입 조심히 놀려. 소냐가 낮은 목소리로 짓씹으며 말했다.
“···총기 불량은 아닐 테고. 급하게 봐야 한다는 이유가 뭐야? 마카로프는 몇 달 전에 데려왔었잖아.”
“슬라이드가 계속 걸려. 분해해봐도 마찬가지야.”
아킨스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소냐를 바라봤다. 소냐와 눈을 마주한 채로 그의 손이 총기를 손쉽게 분해했다. 가벼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오래된 총기의 몸체가 분리됐다. 말끔히 정리한 내부는 연식에 비해 말끔했으나 시간이 쌓이며 생긴 스크래치는 가려지지 않았다. 아킨스키가 총을 훑어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왜. 소냐가 짧게 물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너무 오래 사용해서 바디 자체에 변형이 생겼어. 그래서 슬라이드가 자꾸 걸렸을 거고. 이렇게 미세한 차이는 항상 끼고 다닌 주인이 못 알아보지.”
“설명은 필요 없으니까 고칠 수 있는지나 얘기해.”
“이건 나도 못 고쳐. 총기 자체를 바꿔야 하니까. 미안하게 됐네.”
아킨스키가 테이블 위에 마카로프를 내려놓았다. 60년 넘게 소냐의 곁에 있었던 그것의 손잡이는 붉은 기가 돌았다. 소냐는 그 기이한 색을 총이 그녀와 다른 놈들의 피를 머금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으로 처음 사람을 쐈을 때가 떠오른다.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총성과 목석처럼 쓰러지던 몸, 피를 쏟는 나약한 살덩어리. 이제 이놈은 보내줘. 아킨스키의 조심스러운 말에 따듯한 보일러가 놓인 가게로 돌아온다. 그때 처음 소냐를 지켜줬던 총은 이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늙었다. 금세 재조립해둔 마카로프를 집어 든 소냐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돈은 됐어. 오랜 친구를 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거든.”
아킨스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냐의 손을 피했다. 놈이 돈을 받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구겼다. 더 낯간지러운 소리는 못해주니까 당장 나가, 뱀파이어. 그는 총과 액세서리를 진열한 높은 장식대 뒤로 사라졌다. 밤에 가까워졌으니 아킨스키가 피곤할 때가 되었다. 목도리를 챙기던 소냐가 얼핏 가게 오른편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킨스키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녀의 얼굴과 여전히 같다. 국가의 이름이 바뀌고 소냐가 다섯 번 신분을 바꾸는 동안 아킨스키는 서서히 변했다. 이제 소냐와 그는 부녀뻘처럼 보였다. 어떤 총이든 고칠 수 있는 것처럼 굴더니 저 자식도 늙었네. 작게 중얼거린 것을 용케 들었는지 멀리서 날카로운 되물음이 들려온다. 아킨스키가 다시 돌아오기 전 소냐는 빠르게 가게 밖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해가 진 하늘은 소냐의 머리처럼 새까맣다.
오랜 친구를 품속에 숨긴 소냐가 골목 사이로 걸어갔다. 날은 어둡고 이렇게나 추운 날 밖을 나다니는 사람은 없다. 오늘의 달은 소냐처럼 정체를 숨겼다. 달빛 아래서 번뜩이는 소냐의 눈은 차가운 보라색이었다. 내뱉는 숨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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