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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콘스탄틴, 방랑자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마카이라는 담배의 브랜드를 몰랐다. 니코틴을 입에 달고 산 지가 벌써 몇 년째지만 그는 보통 쓴 것과 단 것으로만 담배를 구분했다. 어차피 매캐하게 폐를 채우는 감각은 어떤 브랜드이건 똑같았다. 이번 것은 향이 조금 쓰다. 깊게 빨아들였다가 입술을 떼고 바닥을 향해 천천히 공기를 밀었다. 잿빛의 담배 연기가 브루클린의 더러운 길거리 위로 흩어졌다. 젊은 흑인 무리가 맥주병을 들고 눈앞을 지나쳤다. 가장 어려 보이는 것과 눈이 마주쳤지만 찰나뿐이었다. 패싸움과 술주정이 일상인 브라운스빌에선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좋았다.

  미카엘.

  빛이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열린 문틈 사이로 금빛 눈이 번뜩였다. 다시 한번 푸우, 길게 숨을 뱉고 담배를 길거리 위로 뱉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사라가 예의상에 가까운 만류를 했지만 마카이라는 이미 구둣발로 꽁초를 지져 껐다. 방금 불을 붙였던 담배는 머리 끄트머리만 겨우 태웠다. 코트의 옷매무새를 다듬은 마카이라가 벽에 기대서 있던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돌아섰다.

  나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심심해서 도와주는 거예요. 빚졌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잠깐 닫혔던 문이 절반만 열리며 주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는 항상 가벼운 티셔츠 위에 갈색 니트를 걸쳤다. 호두나무의 결처럼 부드럽고 짙은 머리카락은 한 줄기로 단정하게 묶여 그의 왼쪽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브라운스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드랍고 하얀 피부 위로 누리끼리한 가로등의 빛이 들었다. 들어와요. 사라가 안쪽으로 비켜섰다. 겨울의 건조한 바람이 부는 바깥과 포근한 옷차림의 그가 어울리지 않아 마카이라는 가게에 들어서기 전 이질적인 계절감을 느꼈다. 문으로 다가갈수록 봄볕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달큰하고 아릿한 꽃의 향기가 마카이라의 매캐한 담배 연기를 몰아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악마에겐 이른 시간이죠. 인간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그렇다면 사라 씨는 어느 쪽입니까.

  길고 어두운 복도를 앞서 걷던 사라가 잠깐 멈춰 섰다. 발소리가 없으니 복도는 서로의 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비좁게 오므라들었던 어깨를 제 손으로 쓸어내린 사라가 조금 더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글쎄요. 알아서 생각하라고 하는 편이라. 복도의 온도는 높은 편이었다. 코트를 걸친 마카이라는 등줄기에서 나가지 못한 열이 모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라가 스스로를 끌어안은 것은 악마에게서 느낀 서늘함 때문일 터였다.

  유황불의 군주인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

방금 것은 멍청한 질문이었다. 마카이라는 복도의 끝인 나무 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는 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리고, 당장에라도 꺾어질 듯한 사람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익히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천사의 자비에도 악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건 어떤 정신력, 그리고 독기가 있어야 가능한 걸까. 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받아낸 몸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가련했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미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라는 이미 그 존재만으로 악마나 천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였다.

큰 도움은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그들의 암묵적 휴전선 같은 존재라,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물고 늘어지려 하거든요.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왜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는지 알겠네요.

  문 위에 손을 얹고 있던 사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답지 않은 금빛이 매섭게 그를 탐구하는 듯했다. 마카이라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숨겨 봤자 소용없다. 마카이라는 거짓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배워왔다. 마침내 나무 문이 열리고 혼탁한 아로마의 향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마치 악마의 등장 같았다. 각각의 향이 매혹적이고 아름다웠지만 그 정도가 심해 밸런스가 무너졌다. 열려 있던 밸브를 잠근 사라가 원목 의자를 하나 꺼내 마카이라를 향해 밀었다.

  미안해요. 일하던 중이라.

  괜찮습니다. ···향이 짙군요.

  악마들에겐 매력적이죠.

  의자에 앉자 가벼운 삐그덕 소리가 나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무너지는 무게 중심이 불안해 마카이라는 제 다리로 수평을 잡았다. 혼자 잘록한 의자 다리는 검게 그을린 티가 났다. 누군가 분을 못 이겨 불똥을 흘린 것이 분명했다. 어색하게 자리 잡고 고개를 들자 사라의 손에 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병 안에 아로마를 담는 중이었다. 아로마는 투명하고 맑았다. 순수한 액체처럼 보이는 저것이 악마의 환심을 사는 용도라는 것은 아직 실감나지 않았다.

  한 번에 다섯 방울이 최대예요. 그 이상은 악마에게 잡아먹히고 싶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사용하는 이들도 있습니까?

  아주 가끔. 미치고 싶거나 미친 사람들이 그러죠.

  후기는 어땠습니까.

  몰라요. 다들 사라졌거든요. 안 들어도 아는 후기 아닌가요?

  사라가 유리병을 건넸다. 평균보다 조금 작은 그의 손에서도 자그마한 병이라면 마카이라의 손에서는 병보단 조각으로 보일 법했다. 내부에 든 액체가 중력에 따라 좌우로 느릿하게 흔들렸다. 평범한 아로마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카이라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 병을 바라보았다. 지옥으로 가는 티켓이라 하기엔 너무나 일상적이고 무난했다. 뚜껑을 열고 가볍게 향을 맡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렬한 꽃 향이 예고 없이 감각을 헤집었다. 마카이라는 곧바로 뚜껑을 닫고 두어 번 콜록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독하지만 익숙한 향이었다. 작은 유리병을 나란히 정렬하는 사라의 뒷모습으로 시선이 가 닿았다. 왜소하게 마른 체형의 그가 살아남기 위해 했을 일들은 마카이라 또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악마의 최음제를 만들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이전에는 다른 일을 했다고 들었다. 그 또한 일반인의 감각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이미 충분하게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하고 싶다면 빨리 여기서 나가세요. 그게 날 도와주는 거니까.

  사라는 돌아봐 주거나 필요 이상의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작고 망가진 의자에서 일어난 마카이라는 작은 병을 코트 안쪽 깊숙하게 넣었다. 노련한 소매치기범도 쉽사리 손대지 못할 깊이였다. 잃어버리면 그 뿐만 아니라 병을 가진 인간에게까지 좋지 않은 일만 그득할 터였다. 마카이라는 집주인과 마찬가지로 어설픈 인사나 존재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나무 문을 열고 점점 서늘해지는 길고 좁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서서히 꽃내음이 옅어졌다. 마침내 두꺼운 현관문을 열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온기를 완전히 밀어냈다. 겨울이 끝나기엔 멀었다. 코트 깃에 묻어 있던 봄의 향기를 적당히 털어낸 마카이라는 중앙 도로 위로 올라갔다. 이대로 길을 따라가다 지하철을 타고 선셋파크로 향하면 최종 목적지가 나타난다. 다시 코트를 단단하게 여미고 담배를 물었다. 오늘은 이미 한 갑을 피웠지만 앞으로의 두 시간 동안은 남은 한 갑을 다 피울 작정이었다. 약이 떨어진 라이터로 겨우 불을 붙이고 소복하게 쌓인 눈 위를 밟았다. 새하얀 1월 초의 눈 위로 무겁게 부츠 자국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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