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지 두 개를 들고 계단을 비스듬히 올랐다.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법한 폭의 계단은 짐을 들고 있으면 벌어진 손의 넓이도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길이 되었다. 한 발씩 걸어 오르니 이미 높은 계단이 더욱 높게 느껴졌다. 윤은 계단의 삼 분의 이 정도 오른 곳에 서서 숨을 골랐다. 체육관과 동아리를 그만둔 후 체력이 떨어진 것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러닝 정도는 해야겠다. 윤은 뻐근해진 두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근육을 풀어준 뒤 다시 손에 봉지 손잡이를 걸었다. 90도로 꺾어진 계단을 따라 마지막 토막을 걸어 오르는 동안 해가 절반쯤 가라앉은 도시의 경관이 보였다. 일정 범위 내로는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대로를 건너서는 빼곡하게 높아 바라보기조차 힘든 건물들이 즐비했다. 대학 기숙사에서 나온 이후로 값싼 월세 집을 전전했다. 다달이 빠져나가는 돈을 보면 전세를 구할까 싶었지만 아무리 구식의 집 구조를 가지고 있어도 전세는 순식간에 거래 리스트에서 사라졌다. 방을 구하기 위해 들여다보던 어플은 얼마 전에 지웠다.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직감은 자그마한 옥탑방에 스며든 공기만으로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비닐봉지를 한 손에 몰아 쥐고 열쇠를 꺼내 들었다. 부드럽게 열리지 않는 문은 두어 번 정도 힘을 주어야 했다. 어깨를 바짝 굳히자 잠금을 푼 문이 튕겨 나오듯 끽,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과 바닥의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열 때마다 금속성의 소음이 났다. 몇 번 집주인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그거 어차피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고치나마나야. 낑낑거리며 집 안에 들어선 다음 다시 팔에 힘을 주어 당겼다. 문이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조용하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윤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장을 봐 온 것을 정리하고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그가 굳이 이 옥탑방을 계약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테라스였다. 툭 튀어나온 공간에 긴 창을 달아 손잡이만 잡아당기면 넓은 서울의 광경이 한눈에 보였다. 때가 껴 있던 테라스 안전망까지 말끔히 닦아 이제는 팔을 걸치고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되었다. 팔을 기댄 채 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려다 말았다. 윤이 이사 오고 얼마 안 되어 담배를 피웠을 때 두 층 더 높은 뒷 건물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는 항의가 들어왔다. 고작 한 개비 가지고 난리일까 싶었지만 집주인의 날 선 경고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담배를 끊었다. 금단 증상은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단지 어느 순간 친구들처럼 떠오르고 불쑥 찾고 싶은 충동이 일 뿐이었다.
오늘은 공기가 맵지 않았다. 윤은 공기 중의 중금속을 맵게 느꼈다. 코가 간지럽고 목이 매캐해져서 이내 매운 것을 먹었을 때처럼 켁,하고 숨을 뱉어내게 만드는 공기는 테라스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윤이 이사 온 이후로 테라스 문은 일 년에 한두 번 열고 말았다. 오늘은 운 좋게 하늘이 맑은 날씨였다. 멀게 남산타워와 아파트 단지, 자주 놀러 다녔던 롯데타워가 보였다. 차가운 철창에 땀으로 조금 젖은 팔을 올리고 파하, 숨을 내쉬었다. 질 좋은 산소가 입 안 가득하게 찼다.
바지에서 몇 번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낯설지만 살가운 문자가 액정에 한 줄 떴다. 곧바로 잠금을 풀고 전화를 걸었다. 짧은 연결음이 뚝 끊기자 어, 하고 답변이 돌아왔다. 민수와 마찬가지로 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비현실적으로 시원한 바람이 훅 불었다.
오랜만이다.
─어. 한 이 년만인가. 바로 전화할 줄은 몰랐네.
또다시 말이 끊겼다. 이번에는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의 시차를 이해한 듯 민수와 윤은 이전의 속도를 맞추는 중이었다. 까치 한 마리가 도시 쪽을 향해 어설프게 날아갔다. 비틀거리는 꽁지깃을 올려다보며 윤이 소리 없이 웃었다. 둘 사이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둘은 여전히 같았다. 처음 만나서 술을 마시고 한참을 싸우다가 매일같이 붙어 다녔던 이십 대 초기의 묵묵한 우정은 아직 살아 숨 쉬었다.
─한국은 지금··· 다섯 시인가?
여섯 시 좀 넘었어. 영국은.
─일하다 땡땡이치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오전 열 시. 잠깐 쉬러 나왔다.
오른쪽 입꼬리만 당겨 웃는 민수의 장난 머금은 표정이 떠올랐다. 민수는 당구장에서 자주 그 표정을 지었다. 못하는 척 공을 미세하게 빗겨 치고 아슬아슬하게 점수를 땄을 때 이야, 지렸다, 하면서 놀리듯 지었던 표정. 반면 윤은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수업 준비하는 중이었어, 라던가 퇴근 일찍 했지, 같은 문장은 아직 그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되묻는 민수의 목소리에 난간 위에 걸쳐두었던 손을 꾹 쥐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직 임용 합격 못 했어?
한 선배도 5번 만에 붙었는데 내가 더 빨리 붙으면 섭하지.
─지랄한다. 너가 언제부터 그렇게 배려심 넘쳤다고.
아하하. 웃는 목소리가 윤 자신에게도 어색했다. 민수는 덧붙여 말하지 않았다. 같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다녀오고, 비슷했던 삶에서 어느 순간 그는 영국으로 떠나 더 넓은 공간을 맛보았다. 윤은 아직 서울에 남았다. 서울 어느 대학원도 아니고 어느 고등학교도 아니다. 그냥 서울 어딘가. 윤은 그곳에서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금방 붙을 거야. 너 똑똑하잖아. 애들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크고.
그렇게 따지면 선배들 다 합격했어야지.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니야. 거기까지 따지면 머리 아파. 그만 생각해.
뚝 잘라 말하는 민수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얼결에 응, 하고 대답하고 나서 윤은 깨달았다. 자신보다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었구나. 타국에 있는 그를 걱정했던 나는 조금 뒤처졌다. 기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감정에 윤은 그냥 아, 힘들다, 하고 중얼거렸다. 바람을 타는 척 공중에 떠 버리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딱 5초 뒤에 비눗방울처럼 부푼 중력을 온몸으로 마주하겠지. 테라스 창을 바라보며 자주 했던 상상이었다. 불안과 공포를 불쾌한 쾌감으로 바꾸는 버릇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생겼다.
좋은 이야기 좀 해보자. 너 동생은 어떻게 지내?
─민이? 그럭저럭 지내지. 이제 대학 졸업반이야.
걔가 벌써?
─그러게. 벌써.
술에 꼴은 민수를 불거진 눈시울로 찾으러 왔던 그의 동생이 떠올랐다. 제 오빠를 닮아 순한 눈매에 귀여운 얼굴을 하고도 어딘가 강해 보이던 분위기를 보고 윤은 그것이 남매의 선천적 기질임을 깨달았다. 제 몸무게의 두 배 남짓일 오빠를 지탱하고 죄송해요,하고 말하던 그녀는 윤보다 단단해보였다. 어릴 적부터 타지에 지내 많은 말을 나누지 못한 남동생을 떠올리면 윤은 민수에게서 무언가 빼앗긴 듯한 감각을 느꼈다.
─너 동생도 이제 대학생일 거 아냐.
군대 갔지. 이제 4개월 됐나.
─벌써?
그러니까. 벌써.
해가 어스름하게 땅 아래로 사라졌다. 구식 주택이 모인 그의 동네는 천천히 불이 켜지는 중이었다. 이 즈음에는 7시에 가로등 불이 켜졌다. 집에 앉아 한순간에 눈을 뜨는 가로등 무리는 공연을 시작하는 하이라이트 등 같았다. 밤이 되고 하나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혹은 누군가는 집을 떠나면 각자의 고독과 어둠 속에 파묻혀 내일을 준비했다. 민수가 있는 곳은 아직 빛이 청명한 낮일 것이다. 그만큼 둘은 달라졌다. 민수와 윤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아무튼, 나 가봐야겠다. 너도 하루 종일 고생했을 텐데 밥 먹고 쉬어.
그래. 오래 통화했다. 한국 들어오면 연락해.
─어. 수고해.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멀거니 도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석양빛에 유리 건물이 붉은빛을 번뜩이며 빛났다. 이제 해가 내려앉으면 모든 것이 암흑에 먹힌다. 윤은 도시가 어두워지기 전 창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북향인 그의 집 안에는 이미 새까만 어둠이 기어들었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참이었다. 흑색을 몰아내기 위해 윤은 스위치를 눌렀다. 환하게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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