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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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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f9T3uZ9dDo?si=Wjn9b9Y2N2mSigGe 

 

 

 

 

  인간은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날은 여전히 춥고 매서웠다.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느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은 세상 전부를 집어삼킬 것처럼 이어졌다. 사현은 잠시 멈춰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 세상이 희고 검다. 무언가를 분간하려 해도 보이는 게 없었다. 눈에 익은 산맥이 전부 하나로 뭉개어진 것만 같다. 사현은 두 손을 곱게 모아 입술에 대었다. 입을 벌리자마자 흰 입김이 뽀얗게 퍼져나간다. 빨갛게 얼은 손끝이 조금 젖다가 말았다. 나오는 숨은 뜨겁지 않고, 손을 두른 공기는 너무 찬 탓이었다. 인간은 이리하던데. 사현은 그새 마른 두 손을 마주 비볐다. 그는 인간을 모방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그가 인간이 되진 않으니까. 역시 눈은 싫다. 사현이 몸을 웅크렸다. 바람을 피하고 열기를 잃지 않기 위해 살과 살을 맞댔다. 그것이 뱀의 방식이었다.

  그는 두 개의 태어나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고 또 다른 하나는 땅에서 배를 떼어낼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이로 껍질을 찢고 나왔을 때, 사현은 세상이 생각보다 춥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당장 무언가를 잡아먹어야만 한다는 사실도. 금수의 몸에 새겨진 본능은 생각 이상으로 강렬했다. 그때의 사현은 언제나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먹는 것과 쉬는 것, 움직이는 것과 감각 하는 것까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그것들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본능만 따르면 된다. 사현은 저보다 작은 것을 잡아먹고 저보다 큰 것을 피해 몸을 누이기를 반복했다. 생존, 그리고 성장. 두 가지만이 삶의 목표였던 때의 일이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사현은 삶의 많은 순간들이 생생했다. 처음으로 뜨거운 것에 이를 박아넣던 순간부터 난생처음 검을 쥐게 된 순간까지. 그래서 지금이 여전히 생경했다. 본능은 그를 눈발이 들이치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숨으라 일갈한다. 동족을 따라 긴 잠에 빠져들거나 추위를 피하라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사현은 땅 위에 있다. 참 이상하다. 모든 동족이 땅 밑에서 깊은 잠을 자는 시기에 대지 위에서 숨을 쉬는 자신이, 그리고 땅을 두 발로 디딜 수 있는 이 몸이.

어느 날 새벽 눈을 떴을 때 익숙지 않은 감각 속에 자신이 완전히 다른 종으로 변해 있는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전에는 없었던 기관과 신체, 세상을 감지하는 감각이 뒤바뀐 몸은 천지가 개벽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현은 처음으로 성대를 떨고 손가락과 다리를 뻗은 순간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어제도 눈꺼풀이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다. 맨몸으로 알을 깨고 나왔듯 맨몸으로 눈이 오는 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켜면서, 그 자신조차 세기 어려울 만큼 긴 세월 만에 처음으로 소리를 내었다. 아. 처음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산등성이를 기어 내려가던 것을 사현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다. 산줄기를 따라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온 세상이 검고 희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인간의 몸으로 본 첫 세상이었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건 사현밖에 없어서 아, 태어나는 건 외롭고 추운 일이구나,라 생각했었다. 그 생각대로 사현의 삶은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된 뒤에도 여전히 조용하고 외로웠다. 무리 지어 사는 게 인간이라지만 그는 인간의 모습일 뿐 인간이 아니라서 그랬다. 뱀은 원래 혼자 사니까. 홀로 겨울을 나는 것이니까.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아직도 뱀이었다. 사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끄무레한 하늘에서 흰 비늘 같은 눈이 흩날렸다.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내려와 사현의 볼과 어깨에 앉았다. 아주 느리게 녹는다.

  또다시 눈이 온다.

 

 

  그가 기억하는 인간의 대다수는 매서웠다. 그들은 항상 쇠와 불을 들고 산을 침범해 무언가를 악착같이 훔쳐 가곤 했다. 그 무언가는 대개 나무였고, 어떨 때는 물이었으며, 꽤 자주 생명이었다. 인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곧잘 탄 냄새와 피가 남았다. 인기척이 들리면 작은 것들은 빠르게 숨었다. 사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에는 그도 한낱 금수에 불과했다. 인간의 발길을 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쇠와 불을 싫어하게 됐다. 쇠가 있는 곳에 피가 있고, 피가 있고 나면 불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불 냄새는 역하다. 지나치는 모든 걸 까맣게 물들이고 버석하게 말려버린다. 뱀인 사현이 그걸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는 희고, 뱀은 축축한 곳을 좋아하니까. 그러나 인간을 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인간은 산에 살지 않아도 산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쇠와 불은 뱀의 이처럼 산의 목을 거머쥐고 숨통을 끊어갔다. 그게 싫었다. 인간의 냄새를 피해 기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야 하는 것이 싫었다. 사현은 질문했다. 왜, 라고. 짐승에 물릴 수 있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분노. 이전에는 느낄 틈이 없던 감정이었다. 아마 그것은 이제 막 몸집을 부풀리던 어린 수컷 특유의 치기였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많은 인간을 물었다. 물고 뜯으며 쉿─ 소리를 내어 위협했다. 날카롭게 내리쳐지는 검을 피해 도망치기도 했고 불 냄새를 맡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현은 대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역을 침범당한 금수로서 응당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때까지도 사현은 짐승이었고 인간을 모방하지 않았다. 영역을 빼앗긴 분노 또한 그의 본능이었다. 오로지 안온한 삶. 질긴 생존만이 그의 목표였다.

  그런 내가 언제 인간이 됐는지. 사현은 자신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흰 손목이 텅 비어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함께한 팔찌를 넘긴 지도 일 년이 되었다. 이제는 무언가 달려 있지 않은 게 더 익숙해졌다. 뱀은 치장을 하지 않으니 이게 더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하다. 사현이 빈 손목을 쓰다듬었다. 삶 이외의 것이 생긴다는 것. 욕심이 갖는 것이 인간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사현은 삶에 집착하지 않았다. 삶은 그저 흘러가는 것, 어련히 살아 있으면 이어지는 것이었기에 끈질기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보다 큰 뱀은 없다. 그보다 큰 짐승은 없다. 이제 인간도 그를 두려워해 산에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 산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은 항상 같았다. 조금은 외롭고, 그렇게 놀랍지 않은 기분. 그래서 팔찌를 건네줄 때도 두렵지 않았던 듯하다. 삶 외의 욕심을 빼앗기는 경험을 그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고작 물건이 사라진다고 밥을 굶게 되는 건 아니잖아. 간단하게 생각했다. 대신 사현은 존재했는지도 모르던 감정을 느꼈다. 호기심.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던가. 사현의 호기심은 무지(無智)를 죽였다.

  스승이 생긴다는 건 다시 말해 배움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면 인간과 같게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사현은 인간의 모습을 했다 한들 한참 부족한 존재였다. 인간보다는 금수에 가까웠다. 맨발로 땅을 밟고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잠들었으며 아직도 불과 쇠를 두려워했다. 기어코 지붕과 벽이 있는 곳에서 잠들기 싫어 비좁은 조각배나 작은 동굴을 찾아 떠났을 정도로 인간의 곁이 불편했다. 그런 그를 입히고 묶어서 말갛게 닦아놓은 자가 스승이었다. 누가 보아도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 자. 천을 여러 차례 두르고 인간의 도구를 들며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자. 그런데 왜 인간이 금수가 들고 있는 인간의 것을 바랐는지 알 수 없었다. 매끄러운 비단과 반짝이는 보석 사이에서 왜 굳이 헐고 다 튿어진 제 팔찌를 원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좀 웃기지. 금수의 화근이란 언제나 그 호기심이거늘. 그럼에도 사현은 두려움보다 먼저 발을 뻗었다. 그리 어여쁜 얼굴로 웃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묘하게 느껴지는 벽과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탐욕스레 앗아가려는 욕심을 묻고 싶었다. 가까이 가면 알려줄까. 사현 또한 생각이 없이 몸을 기댔던 것은 아니다. 검은 인간의 것이니, 인간에게 배우는 것이 맞겠지.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필요한 것을 채우고 나면 끊어질 관계였다. 그러니 물었다. 그러하면, 나의 스승이 되어주겠느냐고.

  관계를 갖는 것이란 애착을 갖는 것인데, 그는 관계도 애착도 가져본 적이 없어 몰랐다.

  처음엔 늙어 죽으면 팔찌만 돌려받고 떠날 생각이었다. 혹은, 검을 다 배우면 자연스레 멀어질 생각이었다. 스승이 사는 곳은 인간의 곁이고 그가 사는 곳은 인간이 닿지 않는 곳이기에 그게 자연스러웠다. 인간은 인간과, 뱀은 뱀과 사는 게 맞으니까. 그래서 매번 이리 찾아올 줄 몰랐다. 그래, 내가 널 찾아가도 되는데. 매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산턱에 발을 들이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그저 먼 곳에 앉아 스승을 기다렸다. 자신을 죽일 생각 없이 찾아오는 인간은 처음이라 나름 신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리 찾아올까 궁금했다. 너와 나의 시간은 분명하게 다르고 너는 곧 내가 귀찮아질 텐데. 뱀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런데도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찾아올 때마다 다른 게 궁금해졌던 것 같다.

  너는 어떻게 웃을까.

  한 번 시작된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다. 스승이 웃는 모습, 지나온 삶, 이야기, 슬픔, 의문, 왜 나의 곁으로 오는지, 내가 밉지 않은지, 나를 미워하진 않는지.

  그러니까, 제자가 스승을 애틋하게 여기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고작 당신이 웃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기에 그것이 새로운 감정임을 알 수 없었다. 춥게 난 존재라 자연히 열기를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외롭고 추운 세상에서 옆에 잡아둘 온기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지금 사현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스승을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알고도 끄집어내지 못했다. 그의 체온을 탐하고, 함께 끌어안고 추운 밤을 지새며 밝은 빛 아래서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나로서는 역부족이라면 다른 이와라도 그리 살기를 바랐다. 나는 아무래도, 차가우니까. 부드러운 피부 대신 비늘을 갖고 따스한 숨 대신 찬 이를 가진 것이니까.

  그게 너에겐 절망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길든 짐승이란, 오로지 혼자인 삶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반려에 중독되는 것에 가깝다. 나와 함께 사냥하고 잠드는 사이. 산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따스함과 소속감에 자유로운 한기를 외면하는 것.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사랑보다는 조금 더 무겁고, 이기적인······ 그래. 갈망, 애원, 너가 나만을 봐주길 원하는 한없이 나약한 마음. 내가 그대에게 매였듯이 그대 또한 나에게 매이기를 바라는 순간.

  가슴에서 입으로, 숨을 길게 밀어냈다. 막 몸 안에서 나온 뜨거운 바람이 뚜렷한 김으로 변해 흩어졌다. 김이 저번보다 늘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산바람은 매섭고, 우리가 걸어온 길은 눈으로 지워지는데 그래도 걸어오는 사람이 멀리 있다. 사현은 매일 같이 그와 만나는 곳에 서서 스승이 걸어오는 때부터 기다렸다. 기다린다 함은 약속한다는 것이라 말을 나눈 것은 없지만 사현은 언제나 약속한 것처럼 기담형을 기다렸다.

  그와 말을 나눈 지 어언 1년이 되었다. 눈이 내렸고, 꽃이 피었고, 비가 내렸으며, 잎이 떨어졌다가 또다시 눈이 내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이 피기엔 길었던 시간인 듯하다. 스승이 궁금하다가, 그리웠다가, 미웠다가, 사랑하기까지 사현은 긴 시간을 보냈다. 몸이 자라는 건 익숙했는데 마음이 자라는 건 익숙하지 않다. 사현은 손에 쥔 작은 꽃을 만지작거린다. 서툰 솜씨로 피워낸 꽃은 너무 작아 당신을 꾸며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에게는 크고 아름다운 게 어울리는데, 가령 나 같은. 그래도 웃어줬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내 앞에서, 나로 인해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쇠와 불을 닮은 당신이지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미소와 꽃이니까. 사현은 이제 안다. 쇠에는 차갑고 두려운 것만 있지 않음을. 사랑하는 사람을 꾸며주고 웃게 해주는 쇠가 있고, 불은 모든 걸 까맣게만 태우지 않고 부드러이 일렁이기도 한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닮은 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꽃이 튼 쇠와 손에 쥘 수 있는 불이 되어주고 싶었다. 멀리 서 있는 스승에게 다가가 작은 꽃을 귀에 끼워준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당신의 얼굴만 보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사현이 헤 웃는다. 예쁘다. 곱다. 참 좋다. 너가 좋다.

 

CM CREPE @clover

 

  우리는 추운 계절에 만났지만 역시 네게는 따스한 봄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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