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니었어도.
강유은은 그 말을 되뇐다. 숨을 크게 들이키는데 몸 안쪽이 후끈하다. 분노로 인한 열이 아릿하게 척추를 타고 퍼진다. 몸이 굳고 뇌가 멈추는 감각. 의심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이다. 나 때문에 떠나는 건 아니라는 말, 그러니까, 당신은 이미 다른 곳에 영혼을 두고 있었다. 그는 하, 소리를 내며 억지로 웃는다. 미간을 찌푸려서 웃는다기보단 우는 것 같다.
쓰레기 같은 새끼. 넌······ 맞아. 항상 이랬지, 신수빈. 항상 이랬어. 말만 곁에 있겠다, 그렇게 말해서 사람을 잡아놓고, 결국은······.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유은은 눈을 감는다. 찬 빗방울을 맞았을 때처럼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화가 나서 주먹이라도 마구 휘두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그러나 널 때리기 위해서는 먼저 맞닿아야 한다. 그럴 수 없다. 한 점의 미련조차 남겨서는 안 된다. 주먹을 매달림으로 바꾸지 않을 자신이 없다. 유은이 턱 막힌 숨을 내뱉는다.
연락하지 마. 눈에 띄지도 마. 구질구질하게 붙잡지도, 내 삶에 남으려고 하지도 마. 영영 떠나줘. 차라리, 내 곁에 남아 있던 너만 기억할 수 있게 해줘.
그리고 그는 속으로 뇌까린다. 나는 너의 특별이 아니다. 나에게는 너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이 없다. 고작 이런 관계니까.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베일이 한 겹 쌓인 것처럼 흐릿한 사이. 유은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고동색 눈이 평소보다도 배로 어두워져 있다.
······수빈이, 연기 잘하네. 너 데뷔해도 되겠다. 장난 한번 살벌하게 하네······.
그러곤 웃는다. 진심으로 크게 웃는다. 아, 웃겨라. 이게 무슨 꼴인가. 수목 저녁 7시마다 방영되는 공중파 드라마 같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