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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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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랬지만, 당신에게는 먹잇감 이상의 경계가 있었다. 한 번 뱀에게 물린 노루가 낙엽 속을 두려워할 때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야 할까. 당신이 표적이 되는 것에 예민하듯 포식자인 그 또한 선별하는 감각에 예민했다. 처음부터 저에게 내보이던 경계심을 모를 수가 없지. 다만 조금 슬픈 건 여기가 연회지라서. 이곳에서까지 경계를 풀지 못하는 걸까, 싶은 마음은 있었다.

명예, 서라벌, 유착······. 그딴 건 뱀은 모른다. 인간들이 아니라 나무들 사이에 끼어 살아왔으니. 자신의 얽매는 것이라면 몸을 부풀려 끊어내면 되었다. 그러나 당신은······. 천 안에 숨겨진 얼굴이 쓰게 변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느껴지는 건 있었다. 필히 매와 오소리 사이에 끼인 뱀 같은 마음이었던 거겠지. 홀로 살아온 뱀은 그 마음을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강한 건 없으니까. 저 또한 실뱀일 때는 모든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자랐다. 하지만, 그 삶의 연속이라니. 지금의 그는 사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포식자로 태어난 뱀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이었다.

······네가 못됐다는 게 아니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는 속삭였다. 둘의 주위로 모여드는 인기척이 점점 커졌다. 그래서. 덮은 천을 쥔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이제야 당신이 불안해하는 게 무엇인지 뚜렷하게 느껴졌다. 근처로 모인 이들 중 단 하나라도 저를 사냥하고자 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도망치고 싶어질 것이다. 뱀은 묵묵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리 둘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이 턱에 묶인 끈을 풀었다. 훅 천을 걷어낸 뱀이 당신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당신 말대로 저는 덩치가 너무 거대하니까, 천으로는 가릴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을 가려야지. 저가 나서면 되지. 이목을 끄는 것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는 흰 머리칼을 훤히 드러내놓고 천으로 당신의 모습을 꼼꼼히 가려주었다. 이쯤이면 되려나. 뿔의 형태는 쉽게 가릴 수 없지만, 잘 덮어놓으면 티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난 말이야, 어릴 때만큼 두려웠던 시절이 없거든. 몸은 작은데 비늘은 희어서 뱀을 먹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달려들었어. 매도, 오소리도, 닭도, 심지어는······ 개구리도. 근데 지금은 어떤 줄 알아? 그것들이 내 비늘을 보고 도망쳐. 숲에서 나만큼 눈에 띄는 게 없으니까. 여기도 그래. 덩치가 무지 큰 여인보다야 희고 거대한 나한테 이목이 끌릴 거야. 내가 이러면 다들 나를 경계하느라 바쁘지, 한림을 궁금해하는 건 없을걸?

그는 당신의 어깨에 턱 팔을 얹고 주위를 훑어보며 잠시 경계했다. 다들 궁금해서 몰린 거겠지만, 그게 당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놔둘 생각은 없다. 말없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에게서는 따스함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차가운 피를 가지고 있는 포식자니까. 그러고는 당신의 등을 먼저 툭 밀어 주막 안으로 들여보냈다.

밀어내도 돼. 근데, 그러면 내가 한림을 도와줄 수 없으니까 조금만 참아주라.

그는 당신에게만 보이게 씩 웃고 인파를 돌아보았다. 구경이라도 났는가? 짐짓 무게를 잡는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를 따라하는지는 뻔했다. 어설프게 당신처럼 말하는 게 경고할 줄도 모르는 뱀 같지만, 그 나름대로의 노력은 했다. 뱀은 어느 정도 무리가 흩어지고 나서야 슬그머니 주막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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