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진 먼지의 맛이 느껴졌다. 타플리카스는 모로 누워 천천히 부유하는 공기의 잔여물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휴일의 아침이라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광경이 어울렸다. 무음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 같은 이질감을 주었다. 문득 나른함이 몰려와 눈을 다시 감으려던 찰나 희미한 진동이 감각을 일깨웠다. 멀리서 울리는 것이 아닌 하나의 벽 건너에서 생긴 일종의 생활 소음이었다. 어차피 평소 그가 일어나던 시간보단 늦었다. 탁자에 놓인 전자시계로 눈을 옮기니 과연 30분이나 더 낮잠을 잔 상태였다. 타플리카스는 서서히 매트리스 위에서 일어나 핸드폰 주변을 더듬었다. 어젯밤 던져둔 머리끈이 손끝에 걸렸다. 그는 먼저 뒤척임으로 엉킨 뒷머리를 대충 모아 묶었다. 충전이 끝난 핸드폰에는 휴일답게 쌓인 알람이 없으므로 곧바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타플리카스는 마지막으로 문을 열기 전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숨을 죽인 진동이 발끝으로 와 닿았다.
그는 두 개의 방이 딸린 집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예기치 않은 동거인에게 안쪽 방을 내어주었다. 타플리카스에게 침대는 아직 익숙지 않은 편안함을 주었다. 그는 거실에 놓아두었던 매트리스를 자신의 방으로 옮겼고 루덴은 자그마한 침대에 누웠다. 편하게 자도록 배려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의 수면 패턴은 엉망진창이었다. 그것은 타플리카스가 고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도시가 조용해질 즈음에 맞춰 잠드는 그에 비해 루덴은 무거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밤을 새우고 햇볕이 따듯할 때에서야 죽은 듯 졸곤 했다. 그나마 나은 건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초기에 비하면 지금은 그럭저럭 자신의 집 정도로는 인식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지금 시간에 거실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밤을 새우고 거실로 나와 무언가를 준비 중이란 뜻이었다. 타플리카스는 문을 천천히 열었다.
방 바깥으로 나와서야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까만 머리통이 흘끗 보였다. 간간이 울리는 진동 외엔 미적지근한 소음뿐인 거실은 무채색한 그와 어울렸다. 타플리카스는 루덴이 놀라지 않게, 작지만 분명한 인기척을 내고 다가갔다. 루덴이 오므리고 있던 어깨를 가볍게 떨고 몸을 돌렸다. 창백한 피부는 빛을 잃지 않았지만 눈가에 얹어진 피로를 몰라볼 리는 없었다. 잠시간 소리 없이 서로를 마주했다.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전철의 쇳소리가 차창을 두드렸고 책의 표지에서 비친 햇빛이 번뜩였다.
그렇게 버티다간 쓰러진다.
처음 꺼낸 자신의 목소리가 기억보다 낮고 단단해서 타플리카스는 눈꺼풀을 움찔했다. 루덴은 호기심과 공포가 공존하는 어린 맹수처럼 몸을 말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저분하게 흩어진 책이 어지럽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타플리카스의 손때가 묻은 책이 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들을 책장에 들일 때 자신 외에는 만질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의 손을 떠나 다른 이의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활자를 내보이고 있다. 존재할 리 없는 구멍 틈새로 한기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타인이라는 분명한 실체에 타플리카스는 척추에 힘을 바짝 주었다.
커피 마실래요?
한 잔만. 또 마시는 건 아니지?
어젯밤에는 차를 마셨어요.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요.
책을 내려놓은 그가 타플리카스를 스쳐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루덴은 소리에 민감했다. 무심한 듯 우아하고 간결한 움직임과는 달리 작은 소음에도 화들짝 놀라는 그를 마주할 때면 타플리카스는 어쩐지 작은 짐승을 놀래킨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루덴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움직였다. 싸구려 실내화가 가끔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음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이 있는 집안치고는 조용했다. 동거인과 지내는 동안 습관은 금세 발, 손끝과 힘에 물들었다. 청각에 둔감한 타플리카스는 루덴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주변에 다양한 파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마다 울리는 신문 배달부 소년의 자전거 체인 소리와 각기 다른 배기음을 내뿜은 자동차 그리고 인간의 움직임. 모든 동작은 소리와 맞물려 있었다. 어쩌면 루덴은 풀 수 없을 정도로 엉겨 있는 행위를 싫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 좀 끓여줄래요.
그래.
구석에 두었던 커피포트를 꺼내 수돗물을 틀었다. 포트 안에 물이 담길수록 소리는 작아졌다. 흔들거리는 투명한 막을 보고 있자니 처음 루덴을 집에 들인 날이 생각났다. 동정할 거라면 지금 당장 날 내쫓으십시오. 그날의 그는 유연한 유리처럼 당장 깨질 것만 같은 동시에 어느 순간에는 부드러운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그가 거절했다면, 유리를 뚝 잘라 쓰레기통에 조심스럽게 넣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깨진 유리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무언가 다른 형태로 합쳐져 그의 곁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형태는 영원히 사라질 거라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얼핏 끙,하고 힘을 주는 소리가 들렸다. 루덴이 까치발을 든 채로 선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가장 높은 층에 넣어둔 거름종이가 그에게 닿지 않았다. 타플리카스가 그의 뒤로 다가갔다. 같은 곳으로 뻗은 손이 그늘막을 만들었다. 찬장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상체에 작은 몸이 닿았다.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집고 눈을 내렸다. 뒤로 절반쯤 돌아선 루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입술을 먼저 물었다. 밤사이 약간 꺼칠하게 마른 살을 이로 눌렀을 때 루덴은 탁자를 조금 강하게 잡았다. 세밀하게 틈이 열렸다. 그들의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고 복잡한 얽힘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살점이 갈라진 곳을 파고들었을 때 타플리카스는 내부에서 달궈진 숨을 먹었다. 뜨겁기보단 간지러웠고 씁쓸한 맛이 있었다. 고개를 모로 틀자 버티고 있던 몸이 완전히 뒤로 돌았다. 높이를 맞추기 어려워서 작은 몸은 그에게 매달렸고 위에서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한 번 맞부딪힌 것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로의 공기를 빼앗아 숨을 쉬었다. 마침내 루덴의 이가 속으로 침투해 점막에 닿는 물체를 깨물었을 때 새된 비명 같은 공기가 허공으로 터져나왔다. 물이 끓었다. 타플리카스의 몸이 뒤로 강하게 밀려 두 발자국 떨어졌다. 루덴은 고개를 숙였다. 수증기가 처음 발정기를 맞은 고양이처럼 울부짖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미 얽힌 것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루덴.
그는 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낙엽처럼 탁자에 두어 장 떨어진 거름종이를 열어 커피를 담고 머그컵을 꺼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은 간헐적으로 떨렸다. 타플리카스는 그것을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관찰했다. 우아함과 무신경을 잃은 동작과 천이 스치는 소리와 고동치는 혈액의 이동을 느꼈다. 불쾌와 흥분은 대개 공존했다. 그것의 증거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우리 친구지?
고개는 들지 않았다. 어떤 소음도 보고 싶지 않았고 어떤 동작도 듣고 싶지 않았다. 타플리카스는 눈을 감고 컵 안으로 떨어지는 커피의 파동에 집중했다. 그 파동은 컵과 거름종이 사이에 갇혀 불분명했다.
······당연하죠.
파동을 끊은 목소리 뒤로 이른 아침의 전철이 지나갔다. 쇠와 쇠가 부딪히고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인간을 담고 외투 속에 담은 감정과 미래를 아침 삼아 출근하는 사람들이 소음으로 흘러들어왔다. 타플리카스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잔을 잡았다. 이물질을 거른 순수의 결정을 입에 담고 삼켰다. 뜨거운 감정이 혀에 튕겨 보이지 않는 속내로 사라졌다.